김경진 기자 오키나와섬은 면적이 약 1199㎢.
‘류큐번(藩)을 선포할 때 청나라는 제 앞 가리기에 바빴다.많은 중국인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.
류구 조정 내의 친일-친중 대립을 말하기도 하는데.덩치 큰 타이완보다 먼저 알려져 백제 멸망 후 중·일 항로로 부각 15세기 해상 요충지에 류구왕국 바다 건너온 중국인이 지배계층 ‘메이지유신 일본.두 문명권 사이 중계무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나타날 때까지도 남양인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.
중·일 사이에서 번영한 류구 왕국류구국 왕궁 슈리(首里)성에서 나하(那覇)시를 내려다본 풍경.중화제국이 남해안까지 확장되고 이슬람제국이 인도양 연안까지 확대되면서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지만.
)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(crab claw sail)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(outrigger)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.
11~15세기 중에 규슈 영주들의 확장 노력이 미친 것이 사쓰난의 범위였다.황금알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‘황청직공도(皇清職貢圖·1769년경)에 등장하는 류구인.
류구를 ‘대(大)류구로.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.
19세기 후반의 격변 속에 류구의 이중성은 가치를 잃었다.류구열도 중 오키나와현에 속한 것은 남쪽의 절반이다.